기원전 500년 전후의 종교 운동 – 축의 시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는 “인류가 겉으로 또는 진짜로 공통의 맥박을 치는 듯이 보이는 시대가 이따금 있기는 했다.”라고 말하면서, 그 예로 기원전 500년 전후의 종교적, 철학적 운동을 언급했다.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원전 5세기 전후의 중요한 사상가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중국의 공자, 인도의 부처,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있다. 또한 아직도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교와 대표적인 정치체제인 민주주의, 공화국의 탄생도 이 무렵이다.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시대가 인류의 역사에 기축을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1949년 <역사의 기원과 목표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서 ‘기축시대의 문명(Axial-Age Civiliz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일어난 영적 과정이 그와 같은 축을 형성하는 듯하다. 그 시기는 오늘날의 인간과 같은 인간이 출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기축시대(차축시대, 축의 시대)’라고 부르도록 하자. 비범한 사건들이 이 시대에 몰려 있다.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살았다. 중국 철학의 모든 경향이

로마 온난기 (로마 기후최적기) – 기원 전후 200년

로마 온난기는 특히 북반구에서의 퇴적물, 나이테, 아이스 코어 및 꽃가루에 대한 수많은 분석으로 충분하게 증명되었다. 또한 중국, 북아메리카, 베네수엘라, 남아프리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및 사르가소 해에서의 연구는 로마 온난기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작가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책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 2003년의 갈리시아(Galicia)에서의 꽃가루 분석은 로마 온난기가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서 기원전 250년부터 450년까지 지속되었다고 결론 지었다. – 알파인(Alpine) 빙하에 대한 1986년 분석에 따르면 100-400년 기간은 직전과 직후의 기간보다 상당히 더 따뜻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후퇴하는 Schnidejoch 빙하에서 회수된 유물은 청동기 시대, 로마 온난기, 중세 온난기의 증거로 여겨져왔다. – 심해 퇴적물을 기반으로 한 1999년 해류 패턴의 재구성은 150년경에 고점으로 로마의 온난기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 아이슬란드 포구의 연체 동물 껍질에서 발견된 산소동위원소에 대한 2010년의 분석은 아이슬란드가 기원전 230년에서 40년 사이에 매우 따뜻한시기를 경험했다고 결론지었다. – 지난 2000년동안의 북반구 온대지방의 온도변화(Liungqvist et al. 2010). 로마온난기(200

후한의 행정 구역 – 삼국지 자료

한대(漢代) 초기에는 군현제와 봉건제가 혼합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으나 한무제 시기에 이르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고 군현제가 자리잡았다. 후한의 행정 구역은 중국 전역을 13개의 주(州)로 나누고 각 주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의 감찰을 맡게 했다. 주 밑에 군(郡)과 국(國)을 두었다. 군태수(太守)는 지방 행정의 중추를 구성하는 군의 통치자였는데, 관리를 천거하고 범죄를 단속하며 전시에는 군대의 지휘권도 주어졌으므로 태수를 하다 자립한 장수가 많았다. 주자사(州刺史)가 군태수를 관리하는 입장이었으나 태수보다 지위도 낮고 군사 기반도 없었다. 그러나 황건의 난 등으로 혼란에 빠지자 군사력을 동원하는 등 자사의 권한을 강화한 주목(州牧)이 등장했다. 위 · 오 · 촉한 모두 자사 혹은 목을 두었다. 군 밑의 현(縣)에는 현령(縣令) 혹은 현장이라는 행정관이 배치되었다. 1. 사례(司隸) ◎ 사예교위부(司隸校尉部)는 한나라 당시 사예교위(司隸校尉)가 관장하며 행정을 감독하는 지역을 일컫는다. 삼국 시대 이후에는 사주(司州)라고 불렸으며, 경조윤(京兆尹)과 하남윤(河南尹)이 각각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다스렸다. 7개 군윤 106개 현. ◎ 낙양(洛陽) :

로마제국과 한나라 쇠락의 시작 – 안토니우스 역병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된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은,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전염병의 대유행이었다. 학자들은 그 고대의 질병을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병은 169년에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목숨과 180년에 베루스와 공동 황제였고 5현제이며 이 역병의 이름과 관련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목숨을 앗았다. 중국의 문헌은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터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다섯 차례 더 중국을 찾아오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그만큼 자주 역병에 시달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이집트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죽였던 것 같다. 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논의는 에드워드 기번(Edward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백제 성왕이 551년 한강유역을 재점령(http://yellow.kr/blog/?p=2395)했지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553년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신라의 기습 공격설이 대표적이지만 백제의 포기설도 있다. 백제의 한성 포기는 『일본서기』의 552년 부분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강유역 점령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동맹은 가야지역의 동향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유역과 가야지역 가운데 어느 곳에 우선순위를 두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에 백제는 가야지역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한강유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면서, 대고구려전 보다는 대신라전에 매달리게 되었다. (김수태, 백제연구, 2006, 44권, 44호)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서 대해서는 동맹이었지만 가야에 대해서는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553년부터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했을까? 일반적인 삼국의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관산성(管山城)전투는 두 나라 미래의 명운을 결정짓는 한판의 승부였다. 이 전투의 중요성을 보면 작지가 않은데,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이 적지 않게 나왔음은 그를 방증한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이 사망한 후 그 설욕을 위해 부심했다. 6세기 중엽까지 성왕을 추모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567년부터 대외적인 외교ㆍ군사 활동을 다시 벌이기 시작했다. 북조(北朝)와 교섭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신라의 상주(上州) 지역을 공격했다. 무왕(武王)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 한다. 하주(下州)와 신주(新州)를 번갈아 공략하여 신라와의 전선을 확대했고, 624년에는 드디어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그 동쪽으로 진격했다. 무왕 말년부터는 하주(下州)에 공격을 집중하여, 신라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642년에 대야성(大耶城)을 점령했다. 대야성이 있는 합천 지역은 하주의 치소가 설치되어 대가야의 故地를 다스리던 정치ㆍ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군은 김춘추 사위인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과

630년에 동돌궐이 항복하고 당태종이 유목민의 칸이 되다

중국사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당唐이다. 원이나 청에 비해 “한족의 왕조”라는 정체성이 있고, 송나라 못지않은 문물을 이룩한 데다 명나라 이상의 국위를 떨쳐, 당시 이슬람제국과 함께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왕조가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당나라를 만든 주인공이 다름 아닌 태종 이세민(李世民, 재위 626년~649년)이다. 그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딴 “정관의 치”는 오랫동안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다. 중앙유라시아 초원에서 552년 돌궐(突厥,투르크)이라는 알타이 산맥의 유목민 부족이 국가를 만들고, 이전의 흉노를 능가하는 대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백강 전투 (백촌강전투, 백강구전투) –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663년 백제 부흥군이 왜(倭)의 지원군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과 백강(白江)지금의 금강(錦江) 하구(동진강 설도 상당하다)에서 벌인 전투로서,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白村江の戦い),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백강 전투가 있었던 백제 부흥 운동 부분을 서술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멸망(660) 이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나 · 당 연합군이 진압에 나서자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백강 전투). 백제 부흥 군은 4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참전과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되어 있다. 박노자 교수는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앞의 글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에서 언급했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요인 중 하나인 당唐과 토번(吐蕃)의 670년 대비천(大非川) 전투에 대해서 조사했다. 비교적 우호적 관계였던 당 태종과 토번의 송첸캄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토번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당나라를 대상으로 당의 실크로드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향후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을 통해 50년 가량을 토번이 실크로드를 장악했는데, 그 중요한 싸움들 중 처음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이 대비천 전투이다. 670년 당 고종(高宗)은 설인귀(薛仁貴)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고, 토번을 공격하게 했다.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토번군을 이끌고 칭하이 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맞서 싸워 당군을 궤멸시키고, 설인귀 등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나라 장수들을 훈계하고 당나라에 돌려보냈는데 이 전투를 대비천 전투라고 한다. 설인귀는 귀국 후 대비천 전투에서의 패전 책임을 지고 한때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대비천에서의 패배로 서역에서의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唐의 야욕에 맞선 신라의 투쟁 그리고 비록 대동강 이남의 지역에 한정되지만 한민족의 기본틀을 형성한 삼국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그 당시 초강대국인 당唐 주위의 지정학적인 상황에 있어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에 대해 살펴보고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중국 · 일본 등의 외국학계에서는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역활을 축소하고 토번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정세를 중요시하는 외부 지향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국내학계는 당시 국제정세는 고려하지 않고 과잉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내부 지향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7세기의 동아시아는 무대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옮겼을 뿐 전국시대와 다름없었다. 중국의 수 · 당, 한반도의 고구려 · 백제 · 신라, 바다 너머의 왜국, 중앙 초원의 돌궐 · 설연타 · 거란 · 토욕혼, 티베트 고산지대의 토번 등이 뒤엉켜 벌인 국제전은 그야말로 ‘유라시아판 열국지’였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합종연횡(合從連衡)이 되풀이되는 복잡다단한 시대였다. 당의 지원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가 어떻게 세계 최강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