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관산성(管山城)전투는 두 나라 미래의 명운을 결정짓는 한판의 승부였다. 이 전투의 중요성을 보면 작지가 않은데,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이 적지 않게 나왔음은 그를 방증한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이 사망한 후 그 설욕을 위해 부심했다. 6세기 중엽까지 성왕을 추모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567년부터 대외적인 외교ㆍ군사 활동을 다시 벌이기 시작했다. 북조(北朝)와 교섭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신라의 상주(上州) 지역을 공격했다. 무왕(武王)이 즉위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 한다. 하주(下州)와 신주(新州)를 번갈아 공략하여 신라와의 전선을 확대했고, 624년에는 드디어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그 동쪽으로 진격했다. 무왕 말년부터는 하주(下州)에 공격을 집중하여, 신라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642년에 대야성(大耶城)을 점령했다. 대야성이 있는 합천 지역은 하주의 치소가 설치되어 대가야의 故地를 다스리던 정치ㆍ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군은 김춘추 사위인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과

630년에 동돌궐이 항복하고 당태종이 유목민의 칸이 되다

중국사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당唐이다. 원이나 청에 비해 “한족의 왕조”라는 정체성이 있고, 송나라 못지않은 문물을 이룩한 데다 명나라 이상의 국위를 떨쳐, 당시 이슬람제국과 함께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왕조가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당나라를 만든 주인공이 다름 아닌 태종 이세민(李世民, 재위 626년~649년)이다. 그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딴 “정관의 치”는 오랫동안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다. 중앙유라시아 초원에서 552년 돌궐(突厥,투르크)이라는 알타이 산맥의 유목민 부족이 국가를 만들고, 이전의 흉노를 능가하는 대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백강 전투 (백촌강전투, 백강구전투) –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663년 백제 부흥군이 왜(倭)의 지원군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과 백강(白江)지금의 금강(錦江) 하구(동진강 설도 상당하다)에서 벌인 전투로서,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白村江の戦い),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백강 전투가 있었던 백제 부흥 운동 부분을 서술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멸망(660) 이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나 · 당 연합군이 진압에 나서자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 갔다(백강 전투). 백제 부흥 군은 4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나 · 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663년 백제 부흥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참전과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되어 있다. 박노자 교수는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대비천 전투 (670년) – 당과 토번의 전쟁

앞의 글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에서 언급했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요인 중 하나인 당唐과 토번(吐蕃)의 670년 대비천(大非川) 전투에 대해서 조사했다. 비교적 우호적 관계였던 당 태종과 토번의 송첸캄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토번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당나라를 대상으로 당의 실크로드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향후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을 통해 50년 가량을 토번이 실크로드를 장악했는데, 그 중요한 싸움들 중 처음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이 대비천 전투이다. 670년 당 고종(高宗)은 설인귀(薛仁貴)를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고, 토번을 공격하게 했다.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토번군을 이끌고 칭하이 호(靑海湖) 남쪽의 대비천(大非川)에서 맞서 싸워 당군을 궤멸시키고, 설인귀 등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나라 장수들을 훈계하고 당나라에 돌려보냈는데 이 전투를 대비천 전투라고 한다. 설인귀는 귀국 후 대비천 전투에서의 패전 책임을 지고 한때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대비천에서의 패배로 서역에서의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나당전쟁과 토번(티베트)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唐의 야욕에 맞선 신라의 투쟁 그리고 비록 대동강 이남의 지역에 한정되지만 한민족의 기본틀을 형성한 삼국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그 당시 초강대국인 당唐 주위의 지정학적인 상황에 있어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에 대해 살펴보고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중국 · 일본 등의 외국학계에서는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역활을 축소하고 토번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정세를 중요시하는 외부 지향적으로 설명하고 있고, 국내학계는 당시 국제정세는 고려하지 않고 과잉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내부 지향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7세기의 동아시아는 무대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옮겼을 뿐 전국시대와 다름없었다. 중국의 수 · 당, 한반도의 고구려 · 백제 · 신라, 바다 너머의 왜국, 중앙 초원의 돌궐 · 설연타 · 거란 · 토욕혼, 티베트 고산지대의 토번 등이 뒤엉켜 벌인 국제전은 그야말로 ‘유라시아판 열국지’였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합종연횡(合從連衡)이 되풀이되는 복잡다단한 시대였다. 당의 지원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가 어떻게 세계 최강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툴루즈 전투 (Battle of Toulouse) – 721년

툴루즈(Toulouse) 전투 (721년)는 아키텐(Aquitanian)의 오도(Odo) 대공의 기독교 군대가 툴루즈를 포위한 이슬람 우마이야(Umayyad) 왕조 알-안달루스 총독인 알-삼(Al-Samh ibn Malik al-Khawlani) 총독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의 나르본에서 아키텐으로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즉,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을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할 유명한 전투인 ‘투르 푸아티에 전투’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투르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Tours) – 732년 711년 이슬람 군대는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다. 719년에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나르본을 점령하여 산맥 너머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그리고 721년에 아키텐을 공략한다. 오도 대공(Odo the Great, ? – 735년)의 출신은 모호하다. 프랑크 왕족이라는 설이 다수지만, 로마인이라는 설도 있다. 오도는 700년 무렵에는 아키텐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도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아키텐의 독립을 기도했던 인물로, 아키텐에서는 대왕 또는 대공이라는 별칭의 the Great로 부른다. 이슬람과 손잡고 아키텐의 분리 독립을

투르 푸아티에 전투 (Battle of Tours) – 732년

투르 전투(Battle of Tours),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로도 불린다. 732년 알 안달루시아 총독 압둘 라흐만(Abdul Rahman Al Ghafiqi)이 이끄는 이슬람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Bordeaux)를 함락시키고 아키텐공(公) 오도(Odothe Great)를 격파한 후 서프랑스의 투르 근방으로 육박하였다. 오도의 요청으로 프랑크과 부르군트 연합군을 이끈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10월에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이슬람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고 압둘 라흐만은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에드워드 기번이 “세계사를 바꾸는 조우遭遇”라고 불렀던 것 처럼,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화의 위기에서 구출한 것으로서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게 단순한 약탈행위 이상으로 유럽에 대한 영구적 정복의 의도가 있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 이슬람의 통치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는 알 안달루시아로 불렸다. 푸아티에 전투가 인상적일 정도로 중요한 승리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저울 위에서 푸아티에의 진정한 무게를 잰다면 그것은 다시 반세기 이상 어느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질지 결정하지 못한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 – 751년

751년의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는 두 개의 제국,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당唐 제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아바스 왕조의 이슬람은 뜨는 해, 당唐은 지는 해로 비유할 수 있겠다. 오늘날 탈라스 전투는 누구나 알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의 당唐 제국과 아바스 이슬람 제국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었던 탈라스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8세기의 중앙아시아는 여러 부족과 지역 강국들, 실크로드 장악을 위한 투쟁 그리고 정치적 권력, 종교적 헤게모니라는 여러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자이크와 같았고, 수많은 전투와 동맹, 그리고 양다리를 걸치거나 배신 등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탈라스강 유역에서 일어난 하나의 전투가 중앙아시아에서의 중국과 이슬람의 패권 다툼을 끝내고 불교/유교의 아시아와 이슬람의 아시아 사이의 경계선을 확정시켰다. 그리고 종이 만드는 방법이 탈라스 전투 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십자군전쟁 (1095 ~ 1291)

십자군전쟁(Crusades)에 대해 알아 보았다. 여기에서는 주로 원인과 성격, 그 영향과 결과에 촛점을 맞추고 조사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래 <개설철학사>에서 얘기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서구사(西歐史)의 내부에서 본다면, 가톨릭 ‘교권’의 신장과 그에 의거한 서구 세계의 중세적 ‘통일’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 개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까지 이슬람 세계의 ‘진격’에 의하여 지리적으로는 자기의 일부에 속하는 스페인까지도 상실했던 서구 세계는 간신히 이 시점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달성하여 ‘반격’으로 전화轉化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십자군전쟁과 같은 유럽 팽창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인 ‘중세 온난기’라 불리는 기후의 변화에 대해서(로마의 번영도 당시 온난기와 상관관계가 있단다)는 다음의 글에서 알아 보았다. * 중세 온난기 – 당시 주요 도시들과 육로, 해상로가 나타난다. (출처 : 두산백과) 이 당시의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연대표를 보면서 파악해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듯 ※ ye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찾았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리오

14세기의 위기 – 기근과 흑사병

지금은 현재 진행중인 ‘지구 온난화’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있다. 그러나 만일 어느 시점에 지구 온난화가 멈춰지고 기온이 하락하며 추워지면 어떻게 될까? 준비하지 않은 기후의 역습에 대한 암울한 결과를 ’14세기의 위기’에서 볼 수 있다. ’14세기의 위기’는 유럽의 번영과 성장을 멈추게 한 14세기 전반과 15세기 초반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인구학적인 붕괴demographic collapse’, ‘정치적 불안정political instabilities’, ‘종교적 격변religious upheavals’이라는 3개의 주요 위기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연속되는 기근과 역병疫病- 특히 1315년부터 1322년까지의 대기근과 1348년의 흑사병 유행 시작 -은 인구를 절반 이상이나 감소시켰는데, 이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로 진행하는 첫 번째 세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 논란이 있는 ‘중세 온난기’를 표현하는 기온변화 그래프이다. ‘중세 온난기’는 다음글을 참조한다. ※ 중세 온난기 (Medieval Warm Period) :  ’14세기의 위기’에서 유럽 국가 내부에서는 민중 봉기와 영국의 ‘장미전쟁’과 같은 귀족들간의 내전은 일상적이었고, 국제적으로도 대표적으로 ‘백년전쟁’과 같은 왕들의 충돌이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단일성은 ‘서방교회의 대분열West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