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년에 동돌궐이 항복하고 당태종이 유목민의 칸이 되다

중국사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왕조는 당唐이다. 원이나 청에 비해 “한족의 왕조”라는 정체성이 있고, 송나라 못지않은 문물을 이룩한 데다 명나라 이상의 국위를 떨쳐, 당시 이슬람제국과 함께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왕조가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 당나라를 만든 주인공이 다름 아닌 태종 이세민(李世民, 재위 626년~649년)이다. 그의 연호인 ‘정관(貞觀)’에서 딴 “정관의 치”는 오랫동안 신화적인 이상정치의 시대인 “삼대(三代)” 다음 가는 최고의 태평성대로 일컬어졌다.

중앙유라시아 초원에서 552년 돌궐(突厥,투르크)이라는 알타이 산맥의 유목민 부족이 국가를 만들고, 이전의 흉노를 능가하는 대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중국의 혼란에 편승한 돌궐의 우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동돌궐의 새로운 카간인 힐리 카간(頡利 可汗, 620~630년 재위)은 이제 막 건국한 당을 자주 침략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즉 그는 내부 문제와 철륵鐵勒(투르크)계 부족들의 반란, 고르지 못한 기후로 인한 가축의 손실이 겹치면서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이로써 630년 동돌궐은 종말을 고한다.

당태종은 서방의 토욕혼(635년),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640년), 구자까지 정복했다. 사실 당태종 본인도  선비족과의 혼혈(당나라 황실이 선비족 출신이라 볼 수도 있다)이므로 북방민족다운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공세로 돌아섰던 것이다.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천가한 (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무대가 이제까지는 중국뿐이었지만 여기서 비로소 중앙유라시아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역사적 사례로 17세기 몽골인들이 청조淸朝 황제를 칸, 18세기 카자흐인들이 러시아의 차르를 차간 칸(白王)이라 부르며 그들의 지배를 수용한 것이 있다.

당인唐人이라는 이름을 낳고, 그 당인들의 국가 당이 세계제국으로 거듭나고 무너지기까지. 당은 한인들의 국가가 아니었다. 유목민과 한족, 즉 胡와 漢이 결합한 국가였다. 당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람들이었다. 640년경의 정황으로서 8000인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이 장안의 국자학(國子學)에서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인들에게 문명과 야만, 화하와 이적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차별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개념이 아니었다. 당이 성장하고 강성해진 배경에는 유목민 역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돌궐은 630년부터 약 50년간 당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여 증흥을 꾀했으나 744년에 철륵의 일파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서돌궐은 일시 위세를 떨치다가 결국 당에게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동돌궐이 멸망한 630년 다음 해에 곧바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 yellow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630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았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김호동 / 돌베개 / 2010.08.20

……이렇게 해서 소위 오호십육국과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화북 지방은 3세기 이상 북방 유목민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동안 그들이 ‘한화’漢化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한인들도 ‘호화’胡化되었다.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수당제국을 건설한 장본인들도 바로 이들 ‘한화漢化된 호인胡人’ 혹은 ‘호화胡化된 한인漢人’이었으니, 학계에서는 그들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당 황실의 시조로 여겨지는 이초고발李初古拔 · 이매득李買得 부자는 한인의 성과 선비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한인인데 선비식 이름을 사여받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원래 선비인데 한인의 성을 사여받았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간에 유목민의 습속이 깊이 배여있던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또한 이매득의 손자인 이호李虎는 서위의 우문태宇文泰에게서 대야大野라는 선비족 성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이병李丙은 선비족 부인을 맞아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당나라의 고조 이연李淵이었다. 이연의 부인도 선비족이었고 그 아들이 태종 이세민이었으며, 당태종과 선비족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고종이었다. 당나라 황실이 선비족 출신이라 말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니, 일부 학자들은 당왕조를 아예 ‘탁발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대漢代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에게 중화와 이적은 분명히 구별되고 섞이기 힘든 이질적인 두 세계였다면, 수당의 건국자들의 눈으로 볼 때 그 두 세계는 상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혼효되어 하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630년 경 북방의 돌궐을 복속시킨 뒤 ‘호한胡漢이 일가一家가 되었다’고 호언한 것은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한마디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들이 ‘원래의 중국’의 범위를 넘어서 북방의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지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유목민 출신이었거나 혹은 유목민과 농경민의 혼혈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목민과 다름없는 막강한 기마군단을 보유하여 전쟁에 투입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멘탈리티를 잘 이해하고 또 그와 유사한 사고 패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  서영교 / 글항아리 / 2015.07.23

600년대 초반 돌궐의 국력은 당나라를 압도했지만, 627년 돌궐에 혹한으로 인한 대규모 자연재해인 조드dzud가 발생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

629년 11월 23일 피지배 부족들과 조카 돌리의 반란으로 힐리 칸의 세력이 현저히 약해지자 태종은 초원으로 10만 대군을 파견했다. 630년 정월, 총사령관 이정李靖의 기병부대 3000명이 정양定襄(지금의 내몽골 허린거얼和林格爾 서북)에서 힐리 칸의 군대를 급습했고, 음산陰山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10만 명을 참수했고, 힐리를 따르던 추장들과 그 수하 5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했다. 옛날에 돌궐로 시집가 살았던 수나라 의성공주를 죽이고 그 아들 아사나첩라시阿史那疊羅施를 잡아 포박했다.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에게 사로잡힌 힐리가 5만 명의 포로와 함께 장안으로 들어왔다.

……

630년 3월 3일 당 태종은 항복한 돌궐의 군장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은 태종에게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로 ‘하늘의 칸(天可汗,텡그리칸)’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태종은 겸양의 뜻을 보였다. “나는 당나라의 천자인데 어찌 초원의 칸이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군장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태종에게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 자신들의 칸이라 여겼다. 군장들과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의 칸이여 영원하라!”하고 만세를 여러 번 복창했다. 그것은 문서에서 공식화됐다. 이후 돌궐 군장들에게 보낼 때에는, 황제의 도장이 찍힌 편지인 새서璽書에 ‘하늘의 칸’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황제 자리를 뺏기고 뒷방 노인으로 있던 상황上皇 고조도 아들 태종의 경이로운 공적에 감탄했다. “800년 전 한 고조 유방은 유목민인 흉노에게 포위돼 곤욕을 치렀지만 보복할 수 없었다. 내 아들 세민은 힐리 칸을 사로잡고 돌궐을 붕괴시켰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신하들 대부분은 돌궐인의 부락 조직을 해체시켜 하남의 주와 현에 흩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유목민인 그들에게 농사와 방직을 가르쳐서 농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온언박溫彦博이 여기에 반대했다. 농민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고유한 물성物性을 어기는 것이다. 기동성있고 용감한 전사인 그들의 장점을 사장시킬 필요가 있는가. 부락을 보존하고, 그들이 살았던 땅과 비슷한 만리장성 이남에 정착시켜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역활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좋은 횟감을 굳이 삶아 먹겠다니, 말도 안된다.

위징魏徵은 온언박과 생각이 달랐다. 돌궐은 대대로 중국을 노략질한 원수다. 그러나 지금 패하고 망해서 항복해오는 바람에 차마 다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을 중국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 몽골 초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을 했지만 짐승과 다르지 않다. 약하면 항복을 청하고 강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항복해온 10만 명의 무리가 시간이 지나 수가 늘어나면 중국에 우환이 될 것이다.

신하들의 견해를 들은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에 돌궐인들의 부락을 온전히 정착시키자는 온언박의 안을 채택했다. 태종은 유목민의 습성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탁월한 전투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당나라 기병으로 부리기로 했다.

태종은 돌궐인 부락들을 동쪽의 요서 유주幽州(지금의 베이징)에서 서쪽 오르도스 부근의 영주靈州(지금의 닝샤후이족자치구 링우靈武)까지 나란히 배치했다. 그곳은 몽골의 초원과 중국을 나누는 자연 경계인 고비사막의 남쪽이다. 왕족인 아사나씨는 각 관할 지역들을 다스리는 도독으로 임명했고, 추장들은 장군으로 임명했다. 당 조정에 5품 이상의 돌궐인들이 100명으로 신료의 절반을 차지했다. 장안에 들어와 사는 그들의 가족 · 식솔들이 1만 가구에 가까웠다.

거대한 예산이 소요됐다. 한 사람마다 사물賜物 5필, 포袍 1령이 지급됐다. 재정이 풍족해서 정착지원금을 준 것은 아니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당나라에 옭아매는 포획장치였다. 태종은 전쟁이 전력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승리 후 항복한 자들을 자신의 군대로 만들어 전력을 배가시켰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는 그의 저서 『천의 고원』 12장 ‘유목론’에서 전쟁기계(유목민) ‘포획장치’에 대해 말했다.

“전쟁기계가 국가에 의해 포획될 우려는 항상 상존한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전쟁기계를 포획해 자신의 군대로 편성해왔고, 포획된 군대는 더 이상 전쟁기계가 아니며, 오히려 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전쟁기계에 대항하는 수단, 혹은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다른 국가를 파괴하는 수단이 됐다.”

여기서 ‘포획장치’란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적의 힘을 역전시켜,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정교한 구조물이다.

태종은 적대적인 인물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중국 동란기의 최후 승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들이 패배했다 해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했다. 태종의 충직한 신하로서 당 제국 건설에 이바지한 자들은 한때 적의 수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돌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작전을 총지휘한 이정, 현무문의 정변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울지경덕, 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주역을 담당한 이세적, 유목민을 만리장성 이남에 정착시키는 데 가장 반대한 위징도 그러했다.

……

태종은 항복해온 유목민 군장들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채용했고, 모두 완전무장한 상태로 자신의 잠자리를 지키게 했다. 일단 굴복한 자에게는 원망이나 시의심으로 접하는 일이 없었다. 태종은 군장들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과 함께 몰이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군장들은 그 도량에 감격해 태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태종은 나아가 돌궐 군장인 글필하력契苾何力,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 등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황제와 군장이 결합된 새로운 씨족이 탄생했다. 씨족 의식은 당 제국을 공동재산으로 생각하게 했고, 제국의 팽창은 씨족 공동재산의 확대를 의미했다. 태종은 이후 유목민 군장들이 이끄는 부락민들을 동원해 투르키스탄과 사막의 인도-유럽계 오아시스들을 정복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태종의 행보에 경악했고 다만 미증유의 영웅적 성취를 바라볼 뿐이었다.

태종이 돌궐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올 것이 확실해졌다. “(631년) 봄 2월 영류왕은 많은 사람을 동원해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여 리나 됐다. 무려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삼국사기』)


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순간들

–  류펑 / 김문주 역 / 시그마북스 / 2009.11.05

황제가 된 이세민은 돌궐의 위협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고 힘을 비축함으로써 또 한 번의 반격을 준비했다. 때마침 동돌궐에 연이은 정벌전과 천재지변이 벌어졌고 설연타 등의 부족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게다가 돌리까지 당조로 귀순하는 바람에 국력이 급격히 쇠퇴해버렸다. 반면, 당나라는 내부 안정을 찾으면서 경제가 점차 회복되었고 동돌궐 진격에 필요한 군사요지인 항안(오늘날의 산서 대동 경내), 삭방(오늘날의 내몽고 조심기 남쪽 벽성자) 등을 얻게 되었다. 당태종은 이윽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서기 630년 정월, 이세민은 대장군 이정에게 힐리가한의 군대를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돌궐 정벌에 나선 이정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그야말로 전설 속의 명장으로 등극했다.

용맹한 기병 3000명을 이끌고 과감히 가한의 심장부를 공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힐리가한은 대경실색하여 고함쳤다. “당나라 놈들, 정작 멸망하고 싶은 게로구나. 감히 이곳까지 발을 들이다니!”

하지만 이정은 힐리가한이 탄식을 내지를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정양에 맹공을 퍼부었다. 힐리는 미처 손을 쓰지도 못한 채 황망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고작 기병 3000명으로 정양을 손에 넣은 이정의 기세는 온 하늘을 찌를 듯했다.

때는 엄동설한인지라, 철산(오늘날 내몽고 경내에 있는 양산의 북쪽)으로 도피한 힐리가한은 지독히도 곤궁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특사를 보내어 이세민에게 강화를 청했다. 사실 이것은 단지 시간을 벌고자 했던 힐리의 계략일 뿐, 이듬해 봄이 되어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한 번 당나라와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힐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홍려경(외교사신) 당검을 철산으로 파견함으로써 돌궐부족에 위로의 뜻을 전했다.

당시 백도(오늘날 내몽고 후허하오터 서북)에 주둔하고 있던 이정은 당검을 배웅해준 뒤,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힐리는 비록 패했지만 그 무리는 매우 용맹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대막(고비사막) 이북으로 도망쳐 회흘, 설연타 등과 연합한다면 완전히 멸망케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 황상께서 특사를 보내셨으니 힐리는 필시 경계를 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때 정예군 1만과 20일 어치의 식량을 마련해 재빨리 습격한다면 힐리가한을 생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정의 말을 들은 부하 장군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표했다. “황상께서 이미 힐리와의 강화를 받아들이고 사절 당검까지 파견했는데 이 시점에 돌발습격을 행한다면 황상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당검이 이미 돌궐 진영에 가 있는 터에 힐리를 습격한다면 당검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이정은 “황상께서 잠시 진격을 멈추라고 직접적으로 명하신 적은 없네. 난 대장군으로서 현재의 전황을 보아 진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일 뿐이네. 돌궐을 철저히 멸하고자 하는데 당검까지 다 돌볼 수는 없네” 라고 설명했다.

이윽고 이정은 정예군 1만 명을 이끌고 당검의 뒤를 좇아 북진했다. 그리고 양산에 이르러 돌궐의 순찰기병을 모조리 섬멸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힐리가한의 막사로 접근해갔다. 당시, 이세민과의 조약으로 득의양양했던 힐리가한은 순식간에 덮쳐오는 당군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병력을 모을 틈도 없이 천리마를 잡아타고 도망쳤다.

며칠 후,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힐리가한은 당나라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돌발습격을 감행한 당군의 전술은 한신이 제나라를 습격할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적군에게 반격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일거에 적을 섬멸한 것이다. 이로써 당군은 돌궐 부족민 15만 명, 가축 수십만 마리 등을 손에 넣었고 음산에서 대막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당조로 편입시켰다.


우리역사, 세계와 통하다

–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 가디언 / 2011.04.07

서기 642년, 연개소문은 고구려 정계에 피바람을 일으키며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영류왕과 그 수하 100여 명을 죽이며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영류왕을 시해한 후 시신을 토막 내 구덩이에 던져 넣는 잔인함을 보인다. 그 후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에 올라 전권을 장악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는 대당 전략에 있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폭발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의 쿠데타였다고 설명한다. 영류왕은 대당 온건파였다. 당고조 이연은 고구려 수나라 전쟁에서 발생한 전쟁포로를 교환하자고 하며 고구려에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고구려도 이에 화답해 1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당고조에 이어 황제에 등극한 당태종 이세민은 내치가 안정되자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 국가에 대한 침략을 준비했다. 630년 당태종은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고구려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그런데 영류왕은 당태종이 힐리가한을 생포한 것을 축하하며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바쳤다.

……

이렇듯 고구려는 돌궐을 비롯한 북방 유목제국과 정치,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활발히 교류하였다. 630년, 당태종이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생포하여 동돌궐을 복속시키자 고구려는 다음 해에 곧바로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한다. 북방 민족의 약화가 곧바로 고구려에 위협이 되는,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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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0년의 돌궐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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