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백제 성왕이 551년 한강유역을 재점령(http://yellow.kr/blog/?p=2395)했지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553년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신라의 기습 공격설이 대표적이지만 백제의 포기설도 있다. 백제의 한성 포기는 『일본서기』의 552년 부분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강유역 점령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동맹은 가야지역의 동향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유역과 가야지역 가운데 어느 곳에 우선순위를 두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에 백제는 가야지역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한강유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면서, 대고구려전 보다는 대신라전에 매달리게 되었다. (김수태, 백제연구, 2006, 44권, 44호)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서 대해서는 동맹이었지만 가야에 대해서는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553년부터 신라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했을까? 일반적인 삼국의 역사지도에는 이즈음부터 신라의 영역으로 한강하류까지 그려져 있다. 그렇지만 한강하류지역은 신라의 최북단으로 고구려 · 백제와 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했다고 봐야한다. 이는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 정세에 따라 수시로 州의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한강유역 州는 진흥왕 14년(553) 신주(新州) 설치 이후 진흥왕 18년(557) 북한산주(北漢山州) 설치, 진흥왕 29년(568) 남천주(南川州) 설치, 진평왕 26년(604) 북한산주 재설치, 문무왕 2년(662) 남천주 이동, 문무왕 4년(664) 한산주(漢山州) 개칭, 문무왕 10년(670) 남한산주(南漢山州) 설치, 경덕왕 16년(757) 한주(漢州) 개칭에 이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양원왕 편에 “10년(서기 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라고 나온다. 신라가 한강하류를 장악하고 있는데 고구려가 어떻게 백제의 웅천을 공격할 수 있을까? 또한 진흥왕순수비 4개중 3개는 당시 군사 · 경제 · 정치적으로 공백지대인 산악에 있어, 진흥왕순수비도 신라의 판도를 추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람이 활동하는 평지에 세워진 순수비는 가야땅의 창령비(昌寧碑)가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한강하류의 진출은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설치와 연관시키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당시의 왕인 진흥왕에 대해 위키백과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을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년).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4세기 후반부터 삼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4세기 후반 ~ 433년 : 고구려 + 신라 ↔ 백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후견기)

– 433 ~ 551년 : 백제 + 신라 ↔ 고구려 (나제동맹기, 성립을 455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553년 : 신라 + 고구려 ↔ 백제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

– 554년 이후 : 고구려 + 백제 ↔ 신라 (이후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삼국통일)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 관련글

– 백제 성왕, 한강 유역 재점령 – 551년 : http://yellow.kr/blog/?p=2395

–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 http://yellow.kr/blog/?p=2414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52년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8년(서기 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八年 築長安城

–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장안성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3년

13년 여름 4월에 전전주승대형(箭田珠勝大兄 ; 야타노타마카츠노오호에)이 죽었다(薨).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德率)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황공하신 천황의 영위에 의한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 백제의 성왕은 왜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중요한 이유로 신라와 고구려가 화통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는 464년경에 결렬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왕이 왜의 원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구려를 들먹였던 것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이 기간에 고구려와 신라의 내통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552년이나 553년 초에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 『일본서기』의 기사를 신빙하여 552년5월 이전에 백제가 양국의 내통을 알고 있었다는 견해, 551년 고구려 혜량법사와 거칠부의 관계, 그리고 혜량법사의 신라투항을 밀약의 계기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553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4년(서기 553) 봄 2월,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 爲小妃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신주(新州)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4년

14년 봄 정월 갑자삭 을해(12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보내 군병을 청하였다.

무인(15일)에 백제의 사신 중부 간솔 목리금돈과 하내부 아사비다 등이 돌아갔다.

……

6월에 내신(內臣 ; 우치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양마 2필, 동선(同船) 2척, 활 50장(張), 화살 50구(具)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칙을 내려 “요청한 군대는 왕이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따로 칙을 내려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라. 지금 위에 열거한 직종의 사람들은 바야흐로 교대할 시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한 복서(卜書), 역본(曆本)과 여러 가지 약물(藥物)도 함께 보내라.”고 명하였다.

……

8월 신묘삭 정유(7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나솔(奈率) 과야신라(科野新羅)와 하부(下部) 고덕(固德) 문휴대산(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內臣) 덕솔 차주(德率次酒)와 임나의 대부(任那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미이거(彌爾居)의 일을 아뢰고, 엎드려 은조를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박국(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을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꼴이 된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략이 이와 같습니다. 신 등이 이를 듣고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뢰는 것입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전군과 후군을 계속 파견하여 구원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가을까지는 해외[海表] 미이거(彌爾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파견군이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 비용은 신이 충당할 것입니다. 임나에 도착하여도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만일 (임나가) 지급할 수 없다면 신이 반드시 충당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적신(的臣)이 삼가 천칙을 받고 와서 신의 나라[臣蕃]를 위무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태만하지 아니하고 정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외[海表]의 여러 번(蕃)들은 모두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영원히 해표의 여러 나라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도하는 바입니다. 이제 임나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를 다스리시길 엎드려 바랍니다. 또한 바다 밖의 여러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황에게 지급받아 강한 적을 막았습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활과 말을 많이 내려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경인삭 기유(20일)에 백제 왕자 여창(餘昌)[명왕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고구려로 향하였다. 그는 백합(百合)의 들판에 요새를 쌓고 군사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그런데 이 날 저녁 바라보니 넓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거의 없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렸다.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서 맞대응하면서 밤새 굳게 지켰다. 새벽녘에 일어나 넓은 들판을 보니 마치 푸른 산과 같이 군기가 가득하게 덮고 있었다.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기(騎), 작은 징[뇨(鐃)자는 잘 알 수 없다.]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자 2기 등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와 있다.’고 말하였다. 어찌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속히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알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성은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군기[標]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고 머리를 창끝에 꽂아 들고 돌아와서 군사들에게 보였다. 고구려군 장수들은 격노하였다. 이때 백제의 환호하는 소리가 천지를 가르는 듯하였다. 또 부장이 북을 치며 속공하여 고구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에까지 쫓아버렸다.

– 내신(內臣) : 『일본서기』에서는주로 왕의 측근으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동선(同船) : 많은 목재를 조립하여 만든 큰 배를 일컫는다.

– 이 시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고구려왕이 백제와의 전투에 출장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전쟁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동성산(東聖山) : 평양 동북쪽에 있는 大聖山을 가리킨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 진흥왕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당시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돌아가셨다.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第二十四 眞興王卽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한국 고대사 1

–  송호정, 여호규, 임기환, 김창석, 김종복 / 푸른역사 / 2016.11.15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한 중부 지역과 정반대로, 남부 지역에서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분할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갔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의 여러 나라는 백제와 신라의 분할 점령을 저지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가령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던 탁순국은 538년 신라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또한 나머지 가야의 나라들은 541년과 544년 백제에 의탁해 신라의 진격을 막으려 시도했지만, 오히려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에 머물렀던 가야는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의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553년 신라는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차지하고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이듬해에 관산성管山城(충북 옥천)에서 신라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군사가 전몰하는 치명적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나제 동맹은 완전히 깨졌고,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 백제 왕실의 원한을 풀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한강 유역 상실 등 대외적 위기 속에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귀족 연립 정권을 수립하면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해 갔다. 이어 고구려는 다시 세력권의 재건을 꾀하면서 한강 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삼국사기』「온달전」에 잘 나타나 있다. 온달은 영양왕嬰陽王대(590~618)에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전사했는데, 비록 설화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러한 온달의 행적에서 당시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644년(보장왕 3)에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로 강화를 맺으러 갔을 당시 “마목현麻木峴(조령)과 죽령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보장왕寶臧王의 말에서도 한강 유역에 대한 고구려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공세를 물리치면서 한강 유역을 안정적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555년에는 진흥왕이 직접 북한산군에 순행을 가서 <북한산 순수비>를 세우고 한강 유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557년에는 최전선인 한강 하류 지역에 북한산주를 설치했고, 한강 유역 진출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국원성(충주)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차산성, 이성산성, 행주산성, 호암산성 등 한강 유역의 중요한 거점에 산성을 쌓고 방어망을 구축했다. 또한 남양만에는 당항성을 쌓아 이를 거점으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신라는 성곽만 축조한 것이 아니라 주민을 이주시켜 본격적인 영역화 작업에 나섰다. 신라는 국원성을 차지한 후, 왕경인을 이주시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력히 추진했다. 충주의 루암리 신라 고분군은 그러한 주민의 이주를 잘 보여 주는 유적이다. 또한 서울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남아있는 석실분은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신라계 고분으로, 신라계 주민들이 이주한 결과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신라가 황해를 횡단하는 중국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 남조 진陳이나 수隋, 당唐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활발하게 추진해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장차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변동시키는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쟁탈전과 管山城 戰鬪

–  장창은 / 학술논문 : 진단학보 제111호 / 2011.04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유역은 553년 7월에 신라에게 귀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551년 후반~552년 전반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맺어진 “麗·羅密約“이 백제로 하여금 고구려의 군사개입을 우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聖王(523~554)은 신라에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倭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는 위장전술을 사용해 신라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면서 관산성 전투를 준비하였다. 554년 5월에 이르러 倭로부터 군사 1천 명 등을 지원받은 백제는 가야군까지 규합하여 554년 7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餘昌이 총책임을 맡아 주도하였다. 백제는 먼저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에 있었던 珍城[금산군 진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승세는 관산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12월 9일에 관산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성왕이 여창을 위로하고자 군사 50명만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다. 이 무렵 신라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新州 軍主 金武力을 필두로 전군을 동원하였다. 신라는 성왕이 관산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관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성왕은 결국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관산성 전투의 전세는 급속히 신라에게 기울어 갔다. 마침내 신라는 관산성을 포위하였고, 여창은 이에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와 퇴각하였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성왕과 좌평 4명을 잃고 백제군 3만 여 명이 전사하는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麗羅戰爭史의 再檢討

–  박경철 / 한국사학보 제26호 / 2007.02

나제동맹의 파탄은 5세기 중반 한강 유역 지배권을 신라가 독점함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여라통호론(麗羅通好論)이 당시 삼국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나지만, 이 논의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담보물 삼아 신라와 제휴함으로써 나제동맹을 결렬시켰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처한 객관적 상황의 절박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고구려 승려인 혜량법사의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라는 시국 인식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 고구려와 당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점인 642년에도 도움을 청하는 신라에 대해 “竹嶺西北之地”의 반환을 강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가 자기 영토를 매개로 신라와 외교적 뒷거래를 하였다는 인식에 대한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사료상 고구려-신라 밀약 내지 고구려-신라 연합의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간취될 수 있음이 인정된다면, 한강 유역을 둘러싼 관련국들 사이의 일시적이며 한정적인 담합과 제휴는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고 본다.

551년 나제동맹의 파괴력을 절감한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 방면에서 가해오는 신라=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완화시킬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한성기의 구영역 수복이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또한 신라는 가야 문제 등 나제 간의 현안을 감안할 때 나제동맹의 실효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영유함을 통하여 독자적 대중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라 측 복안의 실현을 담보할 제휴 상대는 고구려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구려-신라 간의 전술적 제휴는 551년 9월에서 552년 5월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麗羅通好’의 효과는 553년 여나의 공동 출병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고구려는 평양 지역을, 신라는 한성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백제의 반격은 553년 10월 고구려와의 ‘百合野 전투’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554년 겨울 웅천성(熊川城) 공위전(攻圍戰)으로 응수하게 된다. 한편 나제 간의 대결은 553년  12월 函山城戰과 잇따른 554년 7~9월의 久陀牟羅~관산성(管山城) 전투로 치닫게 된다.


552년 백제의 한강유역 포기[棄]와 신라ㆍ고구려의 밀약설(密約說)

–  강민식 / 학술논문 : 선사와 고대 2014 40호 / 한국고대학회 2014년

백제 성왕은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내고, 가야세력의 이탈을 막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안고있었다. 이러한위기를극복하기위해성왕은공동의적을 구체화하여신라혹은가야와왜세력을끌어들여연합전선을형성해나갔던것이다. 이탈과배반을 막고전쟁을통해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성왕은 541년 신라와의 동맹 이후 가야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대가야를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었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내부에 사정을 적극 활용한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신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백제의 한계를 간파한 신라는 백제에게 참전에 따른대가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백제는 550~551년 전역(戰役)의 결과로 얻은 상당 부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된 것이다. 한편 544년 이래 성왕이 끊임없이 고구려와 신라의 공모를 언급한 것은 가야와 왜 세력을영향권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실제 551년까지 대고구려전에신라가 포함된 연합군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후 관산성 전투에도 가야와 왜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강유역회복 후 백제가 한성 평양지역을 포기하고 왕녀를 시집보낸 일 등이 단순히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에 따른 후퇴라기보다는 동맹의 실체였던 것이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주변 정세에 따라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략하고 가야지역에대한 우위를 차지한 후 신라에 대해 공세로 전환한 사건이었다. 그동안의 외교활동을 통해대가야와 왜 연합군을 이루어 마침내 신라에 대한 총공세를 단행한 것이다.


고대로부터의 통신

–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 푸른역사 / 2004.01.05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한 대반격에 나선 것은 6세기 중반이었다. 군사 동맹을 맺은 두 나라는 551년 동시에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방면으로, 신라는 죽령을 넘어 철령 방면으로 진군한 것이다. 고구려는 어느 한쪽도 막아내지 못하고 백제와 신라에게 한강 하류 지역과 철령 이남의 땅을 모두 빼앗겼다. 공포의 대상이던 절대무적 고구려가 쇠퇴의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뚜렷이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한편 이때 고구려한테서 철령 이남 땅을 탈취한 신라의 진흥왕은 554년에는 동맹국 백제로 진격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고, 557년에는 백제한테서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았다. 또한 ‘남천주’ 지역에 있던 군사기지를 한강 하류의 ‘북한산주’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고 군주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산주’ 지역의 군사기지는 이미 556년 동해안 방면에서 ‘비열홀주’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곳에 전진 배치한 군사기지와 함께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라의 추가 군사 진출을 저지하고자 하였지만, 나라 안팎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북진하는 신라를 막을 길이 막막하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신라 역시 그에 못지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성왕이 전사하고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긴 백제가 즉각 보복전에 나섰고, 적대국이던 고구려와 제휴도 불사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국경을 맞닿게 된 신라와 고구려는 일단 현상 유지와 안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동의 필요성에서 고구려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탈취해간 영토를 모두 공인해주고, 신라는 고구려를 향해 배치한 최전방 군사기지를 후방으로 옮김으로써 더 진군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즉, 568년(진흥왕 29) 진흥왕이 직접 두 방면에 있는 세 지역을 순수하여 순수비 세 개(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를 건립한 것은 고구려의 공인 하에 그 이남의 땅이 신라 영토임을 내외에 선언한 의식이었고, 군사기지를 ‘북한산주’ 지역에서 ‘남천주’ 지역으로, 그리고 ‘비열홀주’ 지역에서 ‘달홀주’ 지역으로 후퇴시킨 것은 고구려를 추가 공격하지 않겠다는 반대급부 성격을 띤 의사 표시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한산비> · <마운령비> · <황초령비>는 진흥왕이 정복한 땅을 고구려한테 공인받은 일종의 ‘영토 보증서’라 할 만 하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라고 기록한 구절은 신라와 고구려가 일종의 ‘상호불가침 협약’을 체결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야기 한국고대사

–  조법종 / 청아출판사 / 2007.01.25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는 가야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즉 진흥왕 16년(555)에 비사벌(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으며, 아라가야 또한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진흥왕은 북한산을 순수하여 북방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17년(556)에는 비열홀주(안변)를 설치하여 동북방면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 진흥왕 18년(557)에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두었으며, 29년(568)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다시 남천주(이천)를 두었다가, 진평왕 26년(604)에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당시 주(州)라는 용어는 예하의 여러 군(郡)을 포괄하는 영역으로, 실질적으로는 오늘날의 1개 군 정도를 가리킨다. 상주 · 하주 · 신주 등의 주는 군사적 관할 구역 성격의 광역을, 사벌주 · 비자벌주 · 한성주는 군주의 행정 · 통치 중심지인 협의의 주를 의미한다. 군에 파견된 지방관이 당주이며, 당주는 군주와 마찬가지로 지방관이면서 동시에 군관이었다. 이처럼 자주 주를 설치했다가 폐지한 것은 신라가 그만큼 해당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거듭 고심했음을 뜻한다.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이영훈,신광섭 / 솔출판사 / 2005.01.10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는 귀족사회의 내분으로 힘이 약화되고 서북부 국경에서 돌궐(突厥) 등의 압박으로 힘이 분산되어 있었다. 서기 551년,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와 가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 신라를 무너뜨릴 의도로 552년 백제, 대가야(고령), 안라국(함안) 등의 명의로 왜에 사신을 보내 대규모 병력을 요청하였다.

553년, 신라는 백제의 계략이 실효를 거두기도 전에 한강 유역을 기습적으로 빼앗는 데 성공하고, 다급해진 백제는 속히 왜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554년 왜의 원군이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은 554년 7월에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 운명을 건 일전을 벌였다.

연합군의 수는 2만 6백 명이었으며 이 전투는 한강 하류와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다투는 일전이었다. 그러나 관산성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가야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백제는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어 신라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곧이어 신라는 555년 비사벌(창녕)에 주(州)를 설치하여 백제와 가야의 연합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성왕의 죽음 이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으며, 가야 또한 비슷한 상황에 처했으리라 생각된다. 신라는 점령 지역에 주를 설치해가며 안정적인 지배권을 구축하였다. 한편 함안의 안라국은 급속한 신라세력의 확대에 대하여 외교적 수단으로 존속을 꾀하였다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안정시킨 6세기 중반 이후, 안라국은 별다른 저항 없이 신라에게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 역사비평사 / 2009.09.24

앞에서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설명했는데, 대부분의 학설들은 임나, 즉 경남 일대의 가야 지역이 상당히 오랫동안 다른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및 위왜 자치집단설 등은 가야 지역이 오랫동안 왜의 지배를 받았거나 그 영향 아래 있었다고 말하며, 백제군 사령부설은 가야 지역이 오랫동안 백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동향 중에도 가야의 비독립성을 전제로 한 설명들이 있다.

과연 가야 지역은 그처럼 남의 지배만 받다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제 임나일본부설의 여러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가야사의 재정립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  박영규 / 웅진닷컴 / 2004.11.18

신라의 강성으로 삼국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 또 하나의 세력이 고구려의 서북쪽 변방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북위의 멸망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돌궐이 어느덧 거란을 뒤로하고 고구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551년 가을에 그들은 고구려 국경을 넘어 침입해 왔으며, 9월에는 평양성 북쪽의 신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그들과 대적하게 하였고, 고흘은 뛰어난 용병술로 군대를 인솔하며 돌궐군 1천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이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한반도 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거칠부를 수장으로 내세워 고구려 공략에 나섰고, 돌궐군과의 싸움으로 전력이 대폭 약화된 고구려군은 신라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10개의 성을 빼앗겼다. 이로써 고구려의 한반도 쪽 영토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함경북도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이처럼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양원왕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더 안전한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여 552년에 장안성을 축성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싸움을 벌여 신주를 차지하고 더욱 세력을 확대한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진흥왕에게 화친을 제의하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후비로 시집보내 양군간에 결혼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이전 같지 않았다. 이미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했기 때문에 양국의 결혼동맹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백제의 성왕은 왜에 왕자 창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때에 북제의 공격을 받은 거란 백성 1만여 호가 귀순하는 바람에 백제공격계획을 미뤄야만 했다. 그 무렵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554년 7월에 백제의 성왕이 야음을 틈타 신라를 공격하려다가 되레 복병에게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554년 10월에 백제의 요충지인 웅천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위덕왕(왕자 창)이 이끄는 백제군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양원왕은 더 이상 백제 공략에 나서지 못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거듭된 패배로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중국의 정세마저 심상치 않은 상황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관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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